1519년 스페인 장군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스텍 제국을 점령하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던 땅, 침략자와 이주민들의 통로였던 곳, 바로 베라크루스다. 베라크루스는 멕시코 만 중심, 배가 정박하기 좋은 위치에 있어서 외부 세력의 침입이 잦았다. 번영했던 아스텍 제국이 스페인에게 베라크루스를 가장 먼저 빼앗긴 것도 배를 대기 쉬웠기 때문이다. 베라크루스 곳곳에는 이러한 식민지 역사가 남아 있으며, 몰락하기 전의 아스텍 문화가 그대로 있어 현재와 과거라는 두 개의 시간이 동시에 흘러가는 곳이다. 그로 인해 생긴 독특한 문화와 유산들이 많은데, 그중 유명한 것은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엘 타힌(El Tajin)이다. 엘 타힌은 멕시코 만 연안 해발고도 약 1,400미터 지점에 있는, 독특한 처마 장식과 365개의 벽감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형 신전이다. 번개를 지배하는 신을 섬기던 옛 멕시코의 제사 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다음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요새다. 멕시코에는 금과 은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 침략자들에게 표적이 되기 쉬웠다. 스페인은 멕시코에서 채취한 광물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기 위해 항구로 향했고, 그곳에서 다시 해적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스페인은 자신들의 보물을 빼앗기지 않으려 요새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산 후안 데 울루아(San Juan de Ulua)다. 16세기에 만들어진 이 요새는 수백 년 동안 베라크루스를 지켜왔으며, 오랜 세월 강인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주민들의 노래
침략자들은 그렇게 정복한 땅을 개척하기 위해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 약 100만 명을 데려왔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베라크루스에 정착하면서 현지 원주민들과 결혼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문화를 전했다. 이들이 만든 베라크루스의 민속음악이 ‘손 하로초(Son Jarocho)’다. 손 하로초의 대표적인 노래로는 <라 밤바(La Bamba)>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흥겨운 록큰롤 음악인 <라 밤바>의 오리지널 곡이 바로 손 하로초다.
베라크루스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아티스트가 많다. 레스토랑이나 거리에서 손 하로초를 노래하거나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손 하로초를 연주하려면 맑은 하프 소리가 필요한데, 이 하프 소리는 과거의 슬픈 역사와 남미 특유의 여유로운 기질이 묻어나는 듯 구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이 음악은 주로 베라크루스의 중심지인 소칼로에서 흘러나온다. 소칼로는 멕시코 도시마다 있는 커다란 광장으로 식민지 시절 중앙에서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음악과 춤으로 가득한 축제의 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이 지역 바다를 상징하는 하얀 제복에 멕시코 전통 의상을 입고 매일 밤 춤을 추며 즐긴다.
미국과 멕시코
아스텍 문명이 스페인에 의해 파괴되면서부터 많은 나라들이 이 도시를 오갔는데, 그중 멕시코 만을 끼고 있는 미국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은 멕시코와 무역을 할 때, 베라크루스를 통했다. 그때 가장 먼저 도착했던 항구도시인 베라크루스를 배경으로 한 서부영화가 <베라크루스>(1964)다. 이 영화는 19세기 멕시코 내전을 바탕으로 선과 악의 흑백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신랄한 냉소와 유머로 서부극의 신화를 해체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에서 온통 검정색 옷으로 치장한 할리우드 미남 배우였던 버트 랭카스터(Burt Lancaster)가 가지런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하이에나처럼 잔인한 웃음을 짓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옛날 베라크루스를 침입했던 에르난 코르테스의 입가에 번졌던 탐욕과 정복으로 가득 찬 웃음과 겹쳐보인다. 하지만 과거와 영화 속 모습이 어떠하든지, 오늘날의 베라크루스는 여느 바다 휴양 도시처럼 평온하고 여유가 넘친다.
활발한 항구도시
베라크루스(Vera Cruz)는 산타크루스(Santa Cruz)와 같이 나사렛 예수가 매달렸던 ‘성스러운 십자가’를 일컫는 말 가운데 하나다. ‘성스러운 십자가’란 뜻이 ‘산타크루스’라면, ‘진짜 십자가’라는 뜻은 ‘베라크루스’다. 멕시코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카톨릭 신자라서 고대 문명이 발달한 베라크루스에도 성당이 곳곳에 눈에 띈다.
베라크루스는 그 이름처럼 ‘진짜 십자가’를 지고 끊임없이 배를 품고 내보내는 통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과거에 침략자와 이주민들의 통로였다면 지금은 상인들의 통로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배가 오가고 있는데, 현재 멕시코 무역의 약 70퍼센트가 이 항구를 지날 정도로 베라크루스는 중요한 항구도시로 자리 잡았다.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 베라크루스. 그 이색적인 땅은 과거의 문화 위에 새로운 문화를 더해 지금도 두 개의 시간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매력적인 도시로서 존재하고 있다.
-'문화가 흐르는 바다도시', 현대상선 <바다소리>, 2013년 8월호
'기고글(Writing 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유럽 환상 동화 속 세상, 노르웨이 베르겐 (0) | 2014.04.28 |
---|---|
신화 속의 도시, 그리스 크레타 (0) | 2014.04.18 |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인도 뭄바이 (0) | 2014.04.18 |
바람이 부는 대자연 속으로, 뉴질랜드 웰링턴 (0) | 2014.04.02 |
고달픈 현대인들을 위한 안식처, 아일랜드 더블린 (0) | 2014.03.19 |